미국의 무브온과 한국의 무브온
미국의 무브온운동이 오바마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이라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무브온을 본뜬 시민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많은 분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무브온운동은 시민운동을 정치개혁운동으로 승화 시킨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무브온운동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그와같은 운동이 우리나라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미국과 우리나라의 정치환경은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선거'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복잡한 유권자 등록절차를 거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다는 것이 미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선거제도는 이민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의도적 정책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정치관'에 근거한 것입니다. 자유주의적 정치관은 '선거 참여'를 개인의 이익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한 행위로 보고, 그것을 완전히 자유의 영역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자유로운 개인에게 맡겨져도 그것이 각자에게 이익이라면 자연스럽게 투표를 할 것이기 때문) 능동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준다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고, 무브온과 같은 시민 정치운동단체의 필요성이 절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모든 국민들에게 선거권이 있고, 따라서 평소에는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있지 않더라도, 선거때나 그에 임박해서 국민의 관심을 끌만한 강한 정치적 이슈가 등장하게 될 경우, 언제라도 국민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미국과는 달리 전체 국민 수를 기준으로 볼때 매우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대통령선거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지난 17대 대통령선거의 경우에도 62.9%의(14대 대선 81.9% , 15대 대선 80.7%, 16대 대선 70.8%)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낮은 투표율 이었지만 외국과 비교해 볼 때는 그리 낮은 투표율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정치의 핵심 문제가 '전국적 선거에서의 투표참여'의 문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적절한 주권행사'와 '부적절한 주권행사를 야기하는 구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무브온과 같은 시민단체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다면, 과연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투표 참여하기',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 지원하기', '지역주의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않기'와 같은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으로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로 점철된 우리 정치의 모순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과연 이런한 운동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의 참여와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위에서 언급한 운동들은 분명 의미있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야할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호남지역의 국민들과 수도권지역의 국민들이 지역주의적 정치구도에 갖혀있는 상황 하에서는 시민 유권자 운동이 그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주권온동은 오히려 지역주의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지역주의적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심정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지지와 무조건적인 선거참여가 우리 정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주의가 온존한 상황에서, 그리고 정당이 소수의 엘리트정치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진실로 지지할만한 정당과 후보자를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지지하고 싶어도 지지할만한 후보자가 없으며, 지지할만한 정당도 찾기 어렵습니다.(저는, 지방자치선거에 출마한 영남지방의 한나라당 후보가 그 지역의 민주당 후보보다 더 낳은 능력을 가졌다고 보지 않고,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둘은 서로 별 차이가 없이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확할 것입니다.) 이런상황에서의 '정치참여, 정치개혁 시민운동'이란 정말이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과거 소위 '낙천 낙선운동'이 보여줬던 한계를 생각해 본다면 이것이 더욱 명백해 집니다. 이 운동은 근본적으로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적 정치환경을 바꿀 수 없었고, 결국 제도권 정당들의 선거법 개정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무브온 방식의 시민주권운동이 과거의 '낙천 낙선운동'보다는 더 진전되고 적극적인 운동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적 정치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라는 정치적 대세를 형성하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결국 시민주권운동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책적 차이도 없이 '영남 후보'와 '호남 후보'로 인식되고 있는 지역 대결적 정치구도와, 여기에 기생해서 사실상 거의 아무런 검증도 없이 누군가의 추천이나 간택에 의해 출마하는 정당 후보자만 있는 상황에서는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라는 것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무브온 방식은 정당이나 정치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운동이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권자 등록을 한 사람에 대해서만 투표권을 주는 미국에서는 무권자를 유권자로 조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유권자를 조직하는 과정이 특정 정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자를 조직하는 운동과 동일하기 때문에 강력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투표권이 없던 사람을 적극적으로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로 조직하는 이 운동이야말로 일종의 '표밭을 가는 트렉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모든 국민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브온 방식의 시민운동을 통해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이 올바로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조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해야 할 일은 시민의 올바른 주권행사를 가로막는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항해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운동은 '투표권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치와 선거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고 나오는 정도의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이같은 투표 포기자들의 경우에도 대부분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그런 운동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 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무너뜨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브온 방식의 시민운동으로는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의 결정적 힘인 '지역주의적 정당', '엘리트주의적 정당'을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운동을 해도 '후보자와 공약'은 과거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공약과 후보자가 없으니 아무리 운동을 열씸히 해도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무브온 방식의 시민운동이 매우 긍정적인 운동이면서도, 우리에게 '전략적 대안' 일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전략은 지역주의와 엘리트주의의 근본인 '정당'을 무너뜨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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