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병역거부에대한 판결이 나왔을때 오마이뉴스에 주장글로 기고했던 글이다.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생활하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와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의 삶이 운명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그 삶이 영위되는 공동체 속에서 다른 구성원과 공존함으로서 의미 있게 되며, 개인의 절대적 고립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사회성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구성은 "공동체의 근거로서의 개인과 그 삶의 총체적 공간으로서의 공동체"라는 대전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대전제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이 책임 있는 태도는 당연히 공동체 보위의 의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공동체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로서 내적으로는 구성원들에게 최고의 정치사회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그 질서를 공동체의 구성원 스스로 창출하고, 대외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여러 공동체들에 대하여 구성원들의 이해를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방자치단체나 유엔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전체 정치사회를 보위하는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공동체의 파괴는 그 공동체를 형성하는 모든 개인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가 위협에 처해있을 때 이를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누려온 갖가지 혜택을 지켜내기 위한 자위적 행동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존재의 근거를 제공해준 공동체와 그 구성원에 대한 약속의 이행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국가나 헌법이 형성되기 이전의 문제로 사회라는 인간의 생활공동체의 문제이며 다만 국가라는 형태로 사회가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런 구성원들의 의무가 국가의 보위라는 정치적 형태로 변형되어 강제로 부과되고 있는 것일 뿐 국가와 헌법에 의하여 비로소 생겨난 강제적 의무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사회는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정치적으로 조직될 수 있는 전체적 정치사회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몇몇 이해국들이나 이해집단들의 폭력적의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폭력적 지배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치생활공동체를 보위하는데 있어서 폭력적 수단이 동원되는 것을 불가피하게 인정해야만 하며, 세계시민의 지위에 기해서 이른바 "지역적 국가주의에 의해 강요되는 국방의무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현재 자기 공동체와 그 구성원이 직면해있고 직면할 가능성이 농후한 세계사회의 폭력적 현실 상황을 "양심"이라는 개인의 절대적 가치를 근거로 회피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등한시하겠다는 주장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자기에게 제공한 갖가지의 덕은 다 보면서 공동체를 보위하기 위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 흘린 땀과 희생을 "비양심적"이라거나 "자기의 가치와는 다르다"하여 배제하려는 행위이며 자기의 의무를 방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결국 국방의 의무는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 자기뿐이라면 이는 자기결정의 자유로서 용납될 일이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리고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폭력적 지배에 굴복하게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의미의 공동체 구성원의 초헌법적 의무라고 할 것입니다. 전쟁에 의해 부모 형제가 적국의 폭력에 굴종하는 상황에서 "공공근로나 대체복무"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기 전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양심에 불합치 하는 일일지라도 폭력적 무력의 행사를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국제 사회는 폭력적 질서가 지배한다.
강한 자의 양심이 아랍인들을 알라신에 열광케 합니다. 아랍인들이 알라에 열광하는 것은 폭력과 억압으로 부터 그들의 자유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그들의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그 신념이 바로 알라신이며, 이것이 자유요 공동체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격한 이슬람근본주의와 종교원리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서방의 침략자들이 그들을 과격한 원리주의자로 몰아붙인 측면도 있지만 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종교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왜 이라크 국민들의 대다수는 독재자 후세인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미국에 그토록 저항하고 그들과의 싸움에 목숨을 버리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살폭탄테러를 위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답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근거요 존재의 근거인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공동체를 짓밟는 행위는 자신들의 존재를 짓밟는 것이며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의 타협이나 선악의 판단은 무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정치권력이나 무력에도 항복할 수 없었고 다만 자신들과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을 뿐인 것입니다(여기서 굳이 미국과 강대국들이 아랍인들에게 저질렀던 침략과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폭탄테러를 일삼는 팔레스타인인들이나 이슬람근본주의자를 함부로 지탄 할 수 없는 것은 폭력적 지배와 침탈이 일상화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공동체가 그들의 자유와 그들의 공동체를 폭력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조금의 도움도 주지 못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찬성하는 분들은 "양심과 인격"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양심이 허락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라크인들에게 양심이 허락되고 있나요? 아니요. 그들에게는 양심의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지구상의 모든 양심의 자유는 "강한 자와 강한 나라의 국민"에게만 허락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과연 "침략의 자유" 마저도 허락받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강한 자의 무도한 양심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약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강도 높은 국방의 의무 이행을 강요합니다. 약소국들이나 약소 사회 구성원들의 국방의 의무는 미국이나 영국처럼 몇몇 직업군인이나 호전적인 집총 찬성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약소국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나이 90의 늙은이에서 3살 어린이까지 총력동원의 자세로 그 공동체를 지키지 않는다면 자칫 전쟁의 참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각국의 수많은 전쟁과 침략의 예, 우리 근대사가 그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역의무의 불이행이 인정되는 것은 단 두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첫째는 세계가 평화로운 하나의 정치사회로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전세계정부의 수립이지요. 이렇게 되면 세계가 공동체의 중심이 될테니 국가 단위의 국방의 의무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근본적으로 폐기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양심의 자유도 허용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국민에게 국방의 의무를 강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의 국방력이 강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합의에 의해" 일부 국민에게만 실정법상의 국방의무를 부과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단연코 실정법상의 문제지 근원적으로 공동체보위의무에 기초한 국방의무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경우 양심적 병역거부라 할지라도 그것이 법적 권리 이상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법의 문제는 아니다.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지금 우리나라 헌법학자들의 다수는 "양심의 자유는 내심의 영역에 머무를 경우만 보장되는 것이지 이를 외적으로 표명할 자유까지 보장받을 수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학설과 법원의 재판은 다를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판례도 이런 학설과 다른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 하급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사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애초부터 헌법위반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죄로 결론나든 유죄로 결론나든 국방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고 "누가 싸울 것인가?"는 미해결의 과제로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령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법원의 판결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일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지금 시기 우리사회에서 병역의무라는 것이 구성원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개인 영역의 어느 부분까지 국가가 규제 할 수 있는가, 국가와 사회는 각 구성원의 삶을 어느 정도 배려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새롭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즉 과거 상황에서 세워진 질서에 대해 지금 새롭게 논의함으로써 개인의 사회적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그 구성원을 얼마나 배려해 줄 수 있는지를 논의해 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논의를 생산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병역의무의 근원적 배경", "지금의 국제 정세", "개인이 국가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 "우리나라의 역량 변화"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에 대해 저는 "병역의무의 근원적 배경"을 "공동체 보위의무에 기한 초헌법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국방의무의 대전제이고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한 저의 생각을 쓴 것은 병역의무의 양심적 거부라는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병역의무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 먼저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국제 정세의 상황에 대한 고려입니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로서 정치적으로 조직된 공동체의 안녕과 그 구성원의 안녕은 결코 우리 사회 혼자 지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간략한 글을 통해 "불안하고 폭력적인 국제상황"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셋째로 고려할 것은 우리 사회 각 개인이 사회와 국가에서 가지는 지위입니다. 이는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보위가 그 구성원에 대한 보위와 어느 정도 일치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사회는 특정 기득권세력이나 지배세력의 사회와 국가가 아니며 점차 보통 국민이 우리 사회의 중심주체가 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사회의 건설을 위해 수많은 구성원들이 끝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중심 주체로서의 일반 구성원들의 이익은 우리 사회 보위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앞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더 강화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 나라 국가 역량의 변화상에 대한 고려입니다. 이는 우리사회가 모든 구성원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역량에 따라서 그때그때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고 여기에 따라 최대한 각 구성원의 삶을 배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사회는 아직까지 안보 위협이 있으나 여기에 대처할 만큼 강력한 국방력과 국가 역량은 없습니다. 따라서 국방의 문제에 대해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국방력의 부족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의 국방과 군사력이라는 것이 이미 총칼을 든 군인의 숫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닌 만큼 국가안보에 있어서도 인적 역할 분담을 통한 소수자 배려 정책을 도입하는 것은 구성원의 다양한 삶을 포괄하고 보장한다는 우리사회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책의 도입은 발전된 사회로 나아간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필요하며 검토할 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론으로 국방의 의무는 거부할 수 없는 공동체 구성원의 의무로서 실정법상의 국방의무는 이를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일반 국민이 그 주인된 위치를 확고히 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의무는 자신과 그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것입니다.
또 현 국제정세를 보나 우리 국방의 현실을 보나 우리 사회는 국방에 대한 투자와 고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소수자 배려 정책을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삶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좁은 범위에서라도 이에 대한 정책 배려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는 사회 구성원이 합의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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